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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철-민청학련 사건

성공기록자 2012. 11. 23. 17:44
민청학련 사건
〈이 글은 이철 자전에세이집 『길은 사람이 만든다』(1995년 발행)에 수록된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학교에는 다양한 모임이 있었지만 역시 학생 운동의 중심은 4.19혁명 때부터 뜻 깊게 이어져 내려온 사회과학 서클이었다. 흥사단이나 한국기독학생총연맹 등은 엄격히 말하자면 거기서 갈라져 나온 조직이었다. 황인범, 정윤광 등이 그 쪽 흥사단과 가까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공개적인 노동운동이 전무한 당시 상황에서 두 사람은 노동현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이 상황에서 문리대 학생운동의 핵심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심재권(현재 국회의원, 새천년민주당), 신동수(현재 ‘선농음식살림’ 주식회사 대표), 신금호(현재 서울지방노동위원회 공익위원), 손학규(현재 경기도 도지사) 등이 선배 그룹에 자리 잡고 67학번과 68학번의 유인태(현재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 안병욱(현재 가톨릭대 교수), 안양로, 서중석(현재 성균관대 교수), 최재현(전 서강대 교수) 등이 그 다음 그룹이었다. 나는 대개 이들과 친구였기 때문에 거기에 속했다. 또한 나는 복학생으로서 72학번들과도 같이 생활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후배 그룹을 연결하는 역할까지 도맡았다.

그 밖에도 나병식(현재 민주화운동사업회 상임이사), 정문화(작고), 황인성(현재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 등의 학우들이 여전히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70, 71학번은 여기서 그 이름을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학생이 참여했다. 72학번은 이해찬(현재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강구철(작고), 권만학(현재 경희대 국제경영대학장), 신대균(현재 주식회사 바이오컨 대표)이 모든 활동의 선두에 섰다.
이들은 각자 이듬해 있을 투쟁 방향을 탐색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다. 그러면서 차츰 전체적인 하나의 집단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내가 할 일도 정해졌다.

1973년 12월의 일이었다. 학기말 고사가 끝나고 겨울 방학에 접어들 무렵, 우리는 이곳저곳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문리대의 운동권 세력을 하나로 묶어 나갔다.
법대 쪽에는 오래 전부터 내려온 학생운동 모임이 있었다. 바로 ‘사회법학회’였다. 조영래(변호사, 작고), 이신범(전 국회의원), 안평수(현재 리보종합건설 대표), 최규성 등의 친구들이 그 맥을 잇고 있었다. 후배들도 꽤 많았지만 이름을 대기는 어렵다. 상대 쪽도 법대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 쪽에도 다음해의 투쟁을 준비하는 여러 학생들이 있었다. 이렇듯 문리대, 법대, 상대를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이어지는 가운데 다른 단과대학들도 크고 작은 힘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공대에는 서경석(현재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공동실행위원장)이 있었고 신철영(현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총장)이 그 흐름을 주도했다. 의대는 심재식이 67학번으로 의과대학 운동권 조직에 큰 역할을 했다. 한편 약학대학에서도 현실에 대해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해 보자는 학습 모임이 시작되었다. 서울의 다른 대학들과도 접촉이 이루어졌다.

이화여대에서는 김은혜(현재 (주)여성신문사 부천지사장), 장하진(현재 한국여성개발원 원장) 등의 여학생이 학생운동의 최고참으로 활동했다. 경남 마산 출신의 걸걸한 여학생 최영한 역시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연세대학교에서는 김영준(현재 민주화운동사업회 사료관장), 김학민(현재 학민사 대표), 최민화 등이 핵심적인 활동가였다. 성균관대학교는 송무호(현재 우리지업사 대표), 김한석 등이 중심이었다. 서강대에도 몇 개의 모임이 있었다.

유일하게 고려대학교만 접촉이 어려웠다. 그것은 그 학교의 특수한 사정 때문이었다. 고대의 경우 1973년에 ‘검은 9월단’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물론 박 정권의 조작에 의해 사실과는 달리 누명을 뒤집어쓴 사건이었다. 이 사건 때문에 대부분의 운동권 학생들이 구속되거나 군대에 끌려갔다. 그나마 남은 학생들도 숨을 죽이고 은신해 있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인맥을 찾기가 어려웠다. 우리가 접촉 가능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 이상수(현재 국회의원, 열린우리당)였다. 우리는 법대 4학년이던 그에게 몇 차례 동참할 것을 권했다. 그 일에는 유인태와 내가 나섰다. 교련 반대 시위 때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졌던 유인태가 이상수와 연락이 된 것이다. 우리는 전화를 걸어 당장 만나자고 했다. 그러자 그는 학교 도서관으로 와달라고 했다.

고대 캠퍼스에서 우리는 이상수를 만났다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투쟁을 해왔다. 3, 4월 위기설이 파다한 이때 전면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고대에서도 참가했으면 좋겠는데 우리가 접촉할 대상이 마땅치 않다. 자네가 좀 나서서 고대의 책임을 맡으면 어떻겠는가?”
그러자 이상수는 말했다. “하기야 ‘야생화 사건’ ‘검은 9월단’ 등등의 사건을 겪었으니 우리 쪽의 동지를 찾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내가 나선다면 못할 일은 아니지만 나는 사양하겠다. 현재 나는 이미 나의 진로를 결정했다. 나는 고시공부를 계속해 이것으로 승부를 내겠다. 훗날 다른 장소에서 내가 이 사회를 위해 할일을 찾을 테니 양해해 달라.”

물론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좀더 대화가 이어졌지만 내용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상수의 태도가 당당하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의 분위기로 볼 때 우리의 제의를 거절하는 것은 자칫 이기적이고 비겁한 행동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상수의 결연한 행동과 의지는 그렇게 쉽게 매도해 버릴 성질이 아니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면 우리로서도 인상이 좋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수의 설명에는 공감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결국 그렇게 해서 고대는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뒤로도 이상수는 한 번 더 우리와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검찰 공소장에는 1974년 1월 6일인가로 적혀있는 이른바 ‘민청학련’을 결성한 날이었다. 사실은 1월이 아니라 한 달 전인 12월이었는데 정확한 날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학생대표 모두가 유인태의 집에 모였을 때였다. 이층 양옥집의 반지하 방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각자가 해 온 일을 점검하고 전국적인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지방대학의 대표들도 참석했으니 매우 중요한 모임이었다. 이를 두고 검찰은 ‘민청학련’을 공식적으로 결성한 회의였다고 규정하고 ‘반국가 단체를 결성한 날’로 덮어 씌웠다.
바로 그 자리에 이상수가 참석했다. 그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해 미안해서 그랬겠지만, 한마디도 없이 옆에서 묵묵히 우리의 토론과 회의를 지켜보기만 했다. 우리는 나중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누구하나 이상수의 참석사실을 말한 사람은 없었다. 만일 회의에 참석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면 그것만 가지고도 그는 20년 형은 선고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검찰의 표현대로라면 ‘민청학련’의 지도부가 모두 그 자리에 모인 것이니까 여지없이 반국가단체를 주동한 자로 체포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국가보안법 1조2항에 해당하는 무거운 죄였다.

고대 쪽에서는 불참했기 때문에 회의 참석자들이 수사관 앞에서 고대학생들에 대해서 진술 자체를 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다들 이상수의 그런 태도를 이해하고 의도적으로 숨긴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만큼 성숙한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상수는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훗날 그는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불의에 맞서 싸우는 훌륭한 변호사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약속을 지켰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일은 이화여대와의 접촉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성간의 만남이란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다. 그래서 이대생들과 만나는 일에는 서로 나서려고 했다. 경쟁이 치열했다. 그걸 조정하는데 애를 먹을 정도였다. 결국 몇 사람의 경쟁자가 번갈아 가며 이대생들을 접촉하는 것으로 타협안이 나오고 말았다.

이 무렵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사실 그것은 사건이랄 수도 없었다. 그냥 우연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일은 나중에 아주 중요한 사건으로 내 삶 속에 재등장하게 된다. 문리대 10.2사건이 끝나고 계속해서 앞으로의 투쟁 방향에 대해 의논할 무렵이었다. 마침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나는 친구 유인태와 함께 퇴계로에 있는 제일교회(당시 박형규 목사가 담임목사로 재직중이었다)로 마당극을 보러갔다. 김지하 원작의 <청산별곡>이 임진택(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겸임교수)의 연출로 공연되고 있었다. 당시 태동기에 있던 문화운동 그룹에서 기획하고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바로 그 공연장에서 나는 조직휘라는 후배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내가 경기고 2학년일 때 경기중 3학년이었다. 나보다 2년 아래지만 문예반 활동을 통해 가까이 지낸 후배였다. 그는 어머니가 일본인이어서 일본어에 꽤 능통했다. 조직휘는 그 자리에서 일본기자들이 나와 인터뷰를 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했다. 곁에 있던 유인태가 물었다.
“일본기자들이 왜 우리를 만나고 싶어하지?”
“내년 3, 4월이면 유신 정권으로서도 큰 타격을 입게 되리라고 일본기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 4월 위기설과 관련해서 학생 운동의 지도자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답니다.”

우리는 만나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인 기자들과의 첫 번째 만남은 퇴계로 4가에 있는 조직휘의 거처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조직휘는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조그만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다. 바로 그 방에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일본인 기자가 둘이었고 우리 쪽에서는 유인태와 내가 나갔다. 조직휘가 통역을 맡았는데 상당히 유창한 일본어 실력이었다. 우리는 그들과 한 시간 가량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의 주장은 이런 내용이었다.
“현 정권이 탱크와 총칼을 앞세워 유신헌법을 선포했으며 국민들을 폭력으로 위협하고 있다. 내년 봄의 3, 4월 위기설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계속해서 전면적인 투쟁을 해나가겠다” 그러자 그들이 물었다.
“전면 투쟁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학생들이 일시에 투쟁으로 나서겠다는 것이다.”
“그 방법은 시위가 아닌가?”
“그렇다. 총궐기해서 시위를 벌이겠다.”
“경찰이 막으면 별 수 없지 않은가? 무슨 다른 방법이 있는가?
“저지선을 무너뜨릴 방법을 찾겠다.”
“그 방법이란 무엇인가?”
“보통 돌멩이로 그치지만 저쪽에서 아주 폭력적으로 나온다면 학생들은 아마 각목을 들 것이고, 부득이한 경우 화염병을 들 수도 있다.”
“화염병은 어떻게 만드는가?”
“그건 지금 밝힐 수 없다.”
“화염병을 사용하게 되면 결국 더 큰 폭력을 불러 오는 것이 아닌가?”
“그건 그렇지 않다. 우리의 화염병 사용을 두고 ‘폭력’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런가?“
“우리는 인명을 살상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적당한 충격을 주어 저지선을 돌파하는 방식으로만 사용할 것이다.”
“그런 것이 가능한가?”
“그렇다. 가능하다.”
“그래도 그걸 두고 문제가 확대되지 않겠는가?”
“아니다. 우리는 최소한의 물리력을 행사하려 할 뿐이다. 외국의 학생운동은 납치나 암살 등 인명 살상의 방법도 사용하지만 우리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다. 우리에게 폭력적 방법이라는 것은 해당되지 않는다.”

두 번째의 만남은 기자들이 묵고 있는 을지로의 한 여관방에서였다. 세 번째는 정릉에서 만났는데 통역을 거들어주던 하야카와 마사히로의 집이 정릉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우리 학생들의 강한 의지를 표현했다. 훗날 박 정권이 그 인터뷰 내용을 갖고 ‘폭력수단에 의한 국가반란’이라는 도식을 세울 만했다. 특히 우리는 ‘총을 쏘면 우리는 가슴으로 총알을 받으며 나아가겠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표현을 썼다. 그것은 피를 흘리면서라도 유신정권 타도에 앞장서겠다는 굳은 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폭력 혁명주의자’로 우리를 낙인찍기에 충분했다.

나는 세 차례의 인터뷰로 끝냈고, 유인태의 경우는 한 두 차례 더 접촉했다. 사실 수배 상태에서 도피생활을 하느라 우리는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두 기자가 유인태에게 밥이나 사 먹으라며 만이천원을 건네주었다. 이것은 나중에 “일본인 다치카와 마사키가 조총련의 지시로 한국에 파견되어 이철, 유인태 등에게 폭력혁명을 일으키도록 사주하고 공작금 일만 이천원을 전달했다”는 내용으로 공소장에 기록되었다. 한국의 학생운동이 생면부지의 일본인으로부터 돈 만이천원을 받아 조종되는 것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들 중 하나인 다치카와(현재 일본 일간 "현대" 기자)는 매우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젊은 기자였다. 이듬해인 1974년 4월 초순경 그는 우리에게 건네받은 유인물을 소지하고 출국하려다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또 한사람은 하야카와 마사히로였다. 그는 당시 연세대학교 부설어학연수원에 다니면서 한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주 젊었을 때 일본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탈당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두 사람 모두 일종의 르포 라이터였으며, 세계 이곳저곳을 다니며 화젯거리가 될만한 것을 기사화해 일본의 잡지사에 넘기는 사람이었다. 이 두 일본 사람은 그 인터뷰 때문에 구속되어 우리와 함께 재판을 받고 이십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은 한일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다치카와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내가 겪은 민청학련』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나와는 그 뒤로 소식이 끊어졌다. 그러다가 10년 뒤 내가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미국 방문길에 올랐을 때였다. 그때 나는 미국에 있는 ‘이철 후원회’ 회원들을 만난 뒤에 뉴욕지역 교민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나는 그곳에서 아주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 그는 바로 다치카와였다. 일본 신문의 뉴욕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11년만의 만남이었다. 우리는 농담으로 우리가 ‘공범’임을 확인하는 그런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래서 둘이 나란히 서서 기념 촬영을 했다. 나는 아직도 그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걸까. 나는 가끔 이런 생각에 잠긴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걸까. 또는 그 운명은 인간의 의지로 얼마나 바뀔 수 있는 걸까. 만일 내가 그때 학생운동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그러나 그 무렵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와 내 동년배들이 불의와 독재에 맞서 싸우는 것은 하나의 운명이자 흔들림 없는 의지였다. 나는 그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후회 없는 삶’을 강조했다. 그리고 자기내면의 진실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버님의 말씀에 충실하려고 노력해왔다.

그해가 다가기 전에 무엇보다도 꼭 해야 할일은 문리대 학생운동의 체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우리는 기존의 핵심 인물은 물론이고 새롭게 가담하는 학생들을 묶어서 하나의 체계를 정해나갔다. 제1선은 내가 맡았다. 여기에 나병식, 정문화, 황인성이 가담해 법대와 상대 쪽과 연락을 주고받기로 했다. 제2선은 서중석(현재 성균관대 교수), 안양로가 맡았다. 그리고 유홍준(현재 명지대 교수) 등이 예비군 그룹을 책임지기로 했다. 물론 ‘예비군’이란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임무를 나누다보니 그런 뜻으로 쓰이게 되었을 뿐이다.
1선과 2선의 지휘부가 체포되거나 사정상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이 예비군 그룹이 대신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해 12월, 한해가 끝나갈 무렵부터 문리대를 중심으로 서울대안의 모든 단과대학이 하나로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상대의 김병곤(작고)이 전체 지도부 그룹에 합류했다. 법대에서도 한 사람이 그런 역할을 맡기로 했는데 분명치 않은 이유로 일이 깨졌다. 그 다음으로 서울 시내 각 대학과의 연대 작업이 시작되었다. 고등학생들과의 접촉에 관한 이야기도 오갔다.

우리가 하나씩 단계를 밟아가는 동안 정보수사기관의 대응도 차츰 강력해졌다. 12월 무렵부터 대부분의 학생들에 대한 내부수배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신변 안전에 많은 신경을 써야했다. 나뿐 아니라 적어도 스무 명의 학생들이 이미 집에 들어가거나 공개된 장소를 활보하는 것이 어려운 처지였다. 지방을 오가는 동지들도 모든 일에 철저히 보안을 지키며 숨바꼭질을 계속했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자주 만나 여러 가지 진행상황을 점검해야 하는데 만날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여기저기 숨어 다니며 만남의 장소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장소를 정하는 데 온 정신을 쏟아야할 판이었다. 정해진 은신처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듬해 1월초, 우리는 삼양동 가난한 동네에 방을 하나 얻었다. 나를 비롯한 다섯 명이 합숙을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벌집’이었다.

삼양동 입구의 극장 뒤편에 있는 슬라브 건물이 우리의 아지트였다. 집 전체는 큰 편이었지만 방은 모두 코딱지만 했다. 방이 적어도 열 개가 넘었다. 그렇다고 아파트식은 아니었다. 예전에 여인숙이었던 것을 개조한 듯했다. 손바닥만한 툇마루 하나, 아궁이 하나, 방하나, 그것이 전부였다. 집은 ㄷ자 모양이고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방이 늘어서 있었다. 방 하나에 당시 돈으로 보증금 오만원에 다달이 오천원의 세를 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집에는 주로 공장을 다니는 신혼부부가 살았다. 정식으로 결혼한 부부도 있었겠지만 그냥 동거중인 남녀도 있었을 것이다. 갑자기 떠꺼머리 총각들이 한꺼번에 다섯 명이나 들이닥쳐 그것도 방 한 칸에서 북적대자 다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우리는 공장에 일 나가는 친구들인데 힘을 합쳐 생활하기로 했다고 너스레를 떠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학생 신분을 감추어만 했다. 청계천에 나가 일부러 구닥다리 양복을 한 벌씩 사 입었다. 안경을 쓴 친구는 벗고 오히려 안경을 끼지 않는 친구들은 새로 안경을 맞추어 썼다. 나 역시 안경을 썼다. 평소 입고 다니던 학생티가 나는 옷차림은 벗어던졌다. 한사람이라도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다가는 의심을 살 것 같아 모두들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부지런히 일어나 공동으로 쓰는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밥을 지어 먹었다. 옆방에 사는 아주머니들이 남자들만 모여 산다고 밥하는 일이며 설거지를 거들어주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우리는 서둘러 ‘출근’을 했다. 저녁에는 보통 직장인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한 사람씩 다시 모여들었다. 이때만은 시간이 들쭉날쭉해도 별 의심을 사지 않았다. 우리는 방안에 모여 그날의 일과를 점검하고 진행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것이 우리의 정해진 일과였다. 그 벌집의 단칸방에서 화염병 만드는 실험까지 할 정도였으니 은신처로서는 더없이 훌륭한 장소였다. 나는 날마다 전국적인 상황 점검을 하느라 정신 차릴 새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틈날 때마다 화염병에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다른 동료들에게 알릴 형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나름으로 궁리를 계속하고 있었다.

첫 번째 시도로 나는 의대에 다니는 황승주에게 부탁했다. 군에서 제대할 때 복사해 갖고 나온 관련 자료를 건네주며 실험과 제작을 부탁했던 것이다. 이것은 1급 비밀에 속하는 일이었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극도의 보안 속에 진행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 철저하게 믿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했고, 그 적임자가 바로 황승주였다. 공대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부탁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오히려 화기나 약품 그리고 실험 설비가 잘 갖추어진 의대쪽이 수월하겠다는 판단을 했다. 더구나 공대에는 학생 운동 세력이 만만치 않게 활동하고 있었기에 자칫하다가는 수사기관의 감시에 걸려들 염려도 컸다.

내가 직접 동대문 시장에 나가서 페니실린 병, 박카스 병 등 작은 병을 수십 개 씩 사다가 주었다. 약품을 적당히 섞어 투척 실험을 해보는데 병이 필요했다. 마침 그 친구 집이 산꼭대기에 있어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투척실험을 해 볼 수 있었다. 번번이 실패였다. 자동폭발이 쉽지가 않았다. 만날 때마다 그 친구는 ‘전혀 불가능하다’며 도리질을 했다.
거듭된 실패 끝에 나는 합숙하는 친구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들 역시 큰 관심을 보이며 같이 연구해보자고 했다. 그러던 차에 문득 내 머릿속을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마그네슘’을 이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사진관 앞을 지나가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렇다. 사진관에서 사진 촬영을 할 때 ‘펑’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솟아오르지 않던가. ‘그래, 바로 이거야.’

마그네슘을 이용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것을 쓰면 사람은 다치지 않으면서도 소리는 크고 빛까지 번쩍거리는 실로 위협적인 물건을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은 굳이 실험해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마그네슘을 구하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나는 한번 실험을 해볼까 하는 생각에서 재료상으로 갔다. 재료상에서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많은 양을 건네주었다. 변두리에서 사진관을 하고 있다니까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남은 일은 폭발하게 만드는 ‘뇌관’ 또는 ‘도화선’을 만드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청계천 일대에서는 값싼 도화선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스스로 만들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마침내 성냥개비에서 긁어낸 유황가루를 방안에 수북이 모아 놓았다. 그것을 얇은 종이에 말았다. 불을 붙였다. ‘이런 제길’ 내가 만든 도화선은 도중에 꺼져 버리고 말았다. 몇 번을 시도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에는 풀과 치약을 섞어 짓이겼다. 다음에 그것을 종이에 바르고 유황 가루를 묻혔다. 훌륭한 도화선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실험도 역시 실패로 끝났다. 결국 당장은 화염병 사용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그네슘을 이용해 단순한 위협무기를 만들겠다는 시도는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그것은 순전히 도화선 제작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도는 훗날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측의 엄청나게 중요한 증거로 채택되었다. 그들의 고소장과 판결문에는 ‘각목과 화염병으로 무장해서 청와대를 점령하고 노농(勞農) 정권을 수립하려 했다’고 거창하게 기록되었다. 화염병이라는 용어 자체가 완전한 사실무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처럼 나의 화염병은 살상용 무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겨우 폭발음과 번쩍이는 빛, 연기를 이용하고자 한 과시용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와 유신헌법을 무너뜨리기 위해 우리는 학생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저명한 인물들에 대한 접촉도 시도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분들은 나중에 우리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어 큰 곤욕을 치렀다. 윤보선 전 대통령, 지학순 주교, 함석헌 선생, 박형규 목사,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김찬국 전 상지대 총장, 김지하 시인, 유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등이 그들이었다.

우리는 사회 분위기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 그들을 만났다. 또한 우리의 어려운 형편을 설명하고 적으나마 활동비용을 마련하자는 소박한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수사 기관에서 주장하듯이 거창한 자금 운운할 정도는 아니었다. 12월과 이듬해 1월에 걸쳐 문리대의 선배 그룹이 그 일을 맡아서 했다. 그 결과 3, 4월 위기설에 대한 여러 가지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김지하 시인에 대한 접촉은 주로 내가 맡았다. 당시 김 시인은 정릉에 살고 있었다. 우리는 밤을 새워 가며 진지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3, 4월이 되면 대대적인 투쟁이 전개될 것이다. 지금우리가 앞장서서 그 일을 준비 중이다. 그때 경찰의 저지선을 뚫는 방법으로 지금은 막연한 구상에 머물러 있지만 화염병 사용도 불사할 것이다.”
또한 더 많은 학생들을 참가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도 의견을 말했다. 김지하 시인은 나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자세히 밝혔다. 나중에 김지하 시인은 우리와는 직접 관련 없이 지학순 주교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때 김 시인은 나와 만난 사실을 시인했다. 그 결과 그는 사건의 주요배후인물로 지목되었다. 물론 나중에 체포된 나도 김 시인을 만난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정이야 어떠했든 김 시인이 우리의 활동에 깊이 관계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지하 시인은 서울대 미학과 출신으로 김소월 시인 이후 가장 탁월한 시인으로 평가받던 대표적인 저항 시인이다. 그는 불의에 맞서다가 수차례 투옥되고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하지만 국외에서는 ‘제3세계 작가상’을 비롯한 많은 상을 그에게 주었다. 또한 국내외의 수많은 언론과 문인들이 그의 작품세계에 찬사를 보냈다.
그는 60년대에 재벌, 장차관, 고급 공무원, 장성, 국회의원 등의 다섯 부류를 적으로 규정하는 <오적>이라는 유명한 풍자시를 썼다. 이 시는 문단뿐 아니라 당시 어두웠던 정치판까지 뒤흔들어 놓은 일대사건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사회 저명인사들로부터 자금 자원을 기대한 것은 사실이었다. 유근일 선생은 그 무렵 중앙일보에 재직하고 있었다. 나병식이 주로 그와 접촉하면서 조금씩 돈을 얻어다 쓰곤 했다. 그것은 사실 용돈도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그러나 푼돈으로 얻어 온 그 적은 돈은 수사기관에서 그들을 자금책으로 지목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사실 어느 정도 자금을 받아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거의 얻지 못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분들로부터 받은 자금이 우리의 활동에 큰 도움이 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중 이야기로는 한국기독학생총연맹을 통해 상당한 액수의 돈이 전해졌다고 했다. 그 돈이 우리 학생대표에게까지 흘러들어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윤보선 전 대통령이 무시 못 할 액수를 내놓았다고도 했다. 박형규 목사가 외국에서 들어온 선교 자금을 좀 지원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돈을 만져 본 적도 없었다. 중앙정보부가 수사과정에서 우리 사이를 이간질시키려고 그런 얘기를 꾸며 내기도 했다. ‘어느 쪽에서 어느 정도의 자금이 제공됐는데 그걸 누군가가 도중에서 떼어먹었다’는 식이었다. 그것은 믿을 만한 얘기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실로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주로 ‘부문회’ 회원인 복학생들이 내는 몇 푼의 돈이 고작이었다. 직장을 가진 선배들로부터도 돈을 거뒀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그 돈을 내가 모아서 관리했다. 자취비, 유인물 제작비, 교통비 등을 대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나중에는 각자의 등록금을 미리 당겨다가 모두 활동비용으로 썼다. 그러니까 전체금액을 따져 봐도 지금의 화폐가치로 겨우 몇 백 만원에 지나지 않았다. ‘배후에서 지원한 거액의 자금’ 운운한 수사기관의 선전은 사실과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
지방대학과 연락하는 일도 파란만장했다. 지금처럼 정보통신 장비가 갖추어져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당연히 지방 학생들과 만나는 데 애를 먹었다. 잦은 ‘지방 출장’은 많은 시간을 빼앗았다. 황인성이 주로 이것을 맡았다. 말하자면 지방 대학의 대표자 소집과 회의 진행을 도맡은 것이다. 우리는 서울대생 중에서 해당지역 출신자를 먼저 내려 보내 현지의 학생대표를 만나게 했다. 그 다음에 그들을 통해 다시 다른 학생들과 연결하는 방식을 취했다.

나를 비롯해 유인태, 나병식, 황인성, 정문화 등이 그때그때마다 지방으로 내려가 가능한 모든 인물과 만남을 시도했다. 전남지역, 부산지역, 대구, 경북지역, 강원지역 등이 주요 대상이었다. 지방마다 상황이 다르고 모임도 다양했다. 그 모두를 연결해 일사불란한 시위대를 만들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내가 다닌 곳도 꽤 여러 곳이었다. 호남지역을 다니면서 전남과 전북 쪽을 교섭할 때 여러 사람과 만날 수 있었다. 광주에서 전남대 출신 박석무(전 국회의원)를 처음으로 만났다. 또 한 사람 조학송은 문리대 65학번인가 66학번인데 선배로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선배를 통해 이강(현재 새마을회 사무처장), 김정길(현재 전민련 공동의장), 윤한봉(현재 민족미래연구소 소장)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전남 지역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이들 중 윤한봉은 1980년 ‘광주항쟁’ 당시 최선두에서 활동하다가 전두환 정권의 칼날을 피해 미국으로 밀항했다. 선박 밑창에 숨어 꿀 한 병으로 수십 일을 버틴 그의 밀항담은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진다. 13년 뒤인 1993년에야 그는 정부의 귀국 허용을 받고 망명 생활에서 풀려났다.
광주 출신인 법대의 안평수도 전남 지역 교섭에 한몫 했다. 전주에서는 그 지방 출신인 법대의 최규성이 전북대학교 학생 대표들을 소개했다. 그 결과 전북대학교와도 만남이 이루어져 호남 지역 전체의 연락망을 만들 수 있었다.
대전은 안양로와 강구철이 나서서 충남대학교와 목원대학교의 연결 창구를 만들었다. 부산 지역에서는 김재규(현재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가 책임을 맡았다. 또한 강원 지역은 유인태가 나서서 강원대학교의 최열(현재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과 접촉했다. 대구 ․ 경북 지역은 경북대의 여정남이 총책임을 맡기로 했다. 여정남은 우리보다 연배가 한참 위였지만 3선 개헌 반대투쟁 때부터 우리와 여러 차례 토론을 함께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계가 이어졌다.

여정남은 자주 서울에 올라왔다. 지금도 기억이 선명한 을지로의 ‘용금옥’이라는 식당에서 추어탕을 먹으며 그는 우리와 시국담을 나누었다. 여정남의 소개로 이강철(현재 열린우리당 중앙위원), 임구호(현재 자영업), 정화영(현재 한겨레문고 대표) 등이 우리와 연결되었다. 이들이 대구, 경북지역 활동의 핵심이었다.
여정남은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학생운동 뿐 아니라 그 쪽 지역의 사회운동에도 깊이 관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뒤에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완전한 조작극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그 사건으로 모두 여덟 명의 젊은 희생자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반국가 지하 단체를 결성한 빨갱이 집단이라는 누명을 쓰고서.....
‘민청학련’ 과 ‘인민혁명당’ 이 손잡고 대대적인 정부 전복을 계획했다는 수사 기관의 발표를 가능케 한 연결 고리가 바로 여정남이었다.

마침내 지방의 핵심 인물들과 연대가 이루어졌다. 우리는 전국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하여 1월 중순부터는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차원에서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여러 차례 모임을 가져야 했다. 장소는 대개 대전이었다. 대전역 광장의 뒷골목에 있는 ‘사랑방’이라는 다방에서 주로 만났다. 그 곳은 동숭동 서울 문리대 앞의 ‘학림다방’처럼 학생들이 즐겨 찾았던 곳이다.
가끔은 부산이나 다른 지역에서 모임을 갖기도 했다. 전국 회의에 서울 쪽 대표들이 모두 참석할 수는 없었다. 그 일을 주로 황인성이 맡았다. 자연히 황인성은 ‘지방 출장’이 잦았다. 그는 회의 결과를 서울에 있는 우리에게 보고했다. 서울과 지방의 학생 대표들이 어느 정도 연결되었다. 우리는 동시 다발적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했다. 유인물 역시 전국적으로 같은 내용으로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에 있는 지도부에서 그 준비를 맡았다 (지도부란 명칭을 공식적으로 쓴 것은 아니었다. 모든 계획과 진행을 주도했다는 뜻에서 편의상 부른 말이다).

삼양동 자취방에서 돌아와서도 밤늦도록 그날의 활동에 대해 점검했다. 회의를 마치면 우리는 통닭에 소주를 곁들인 간단한 회식 자리를 가지고는 했다. 이때 주로 유인물의 내용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오갔다. 선언문 형식의 전체적인 글이 필요하다는 데는 아무도 이의가 없었다.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우리 학생이 왜 나서게 되었는가를 설명했다. 그리고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국민들에게 유신독재의 사슬을 깨는 거사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기로 했다.
나중에 또 한 가지의 유인물이 덧보태졌다. <민중의 소리>라는 담시(譚詩)였다. 이것은 장기표(현재 한국사회민주당 대표) 선배가 당시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상을 풍자해 만든 4.4조의 흥겨운 가락으로 이루어진 재미있는 내용이었다. 긴 내용의 4행시인 <민중의 소리>는 지금 생각해도 순수 문학 작품에 버금가는 뛰어난 작품이었다.

선언문은 나병식이 초고를 쓰고 여러 사람의 토론을 거쳐 최종적으로 내가 약간 수정해서 완성했다. 나는 그 글의 제목을 ‘민중. 민주. 민족 선언문’이라 정했다. 선언문은 작성자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의 의견을 짜깁기한 공동 작품이었다.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선언문의 바탕으로 삼자는 의견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그것은 당시까지의 학생운동이 주창했던 사항으로 선언문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중요한 것은 ‘민중’이란 개념이었다. 나는 민주화가 단순히 정치제도를 민주주의로 세우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민중의 생존권 보장이 이루어졌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민주화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선언문에 ‘민중’의 개념을 포함시키기로 결심했다.
“현 정권은 민중을 착취하는 파쇼 체제다. 민중은 이러한 체제를 무너뜨리고 진정한 생존권 확보를 위해 싸워야만 한다.”
나는 선언문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이것이 바로 학생운동사에 ‘민중’의 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문서다. 그것은 우리의 학생운동이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 받게 된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국민에게 드리는 글>은 상과대학의 김병곤이 초안을 작성하고 내가 많은 부분을 수정해 완성했다.

김병곤은 문장을 만드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기도 했지만 글씨 또한 멋들어지게 썼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이란 바로 탁월한 재능을 가졌던 김병곤을 두고 하는 말이었을까. 김병곤은 민청학련 당시 서울 시내 각 대학의 연락 총책이었다. 사건 이후 석방된 뒤에도 ‘도시산업선교회’, ‘민주화운동 청년연합’ 등에서 잠시도 민주화 투쟁을 쉬지 않았다. 그는 1987년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노태우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구로구청 투쟁의 상황실장으로 일하다가 구속되었다. 그러나 그는 수감 중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가석방되었다. 건강 진단 결과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온몸에 암이 퍼져 있었다. 1990년 11월 그는 영영 눈을 감았다. 한 인간의 정의로운 삶이 그렇게 해서 막을 내렸다.

유인물의 내용이 결정되고 제작에 들어갈 때쯤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선언문의 주체’ 문제였다. 선언문과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의 글을 쓴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그 주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출처분명의 괴문서로 취급받을 게 분명했다. 그런 불명예를 벗고 우리의 의지를 보다 분명히 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무슨 단체로 이름한 적이 없었다. 특정한 이름을 내거는 모임도 아니었다. 하지만 결단의 시기가 다가오면서 선언문 주체를 당당히 밝혀야 했다. 이제 명칭 문제가 제기되었다.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모든 청년학도가 궐기한 것이라는 정도만으로는 너무 추상적이고 막연했다.

막상 선언의 주체를 밝히자는 말이 나오자 많은 주장이 오갔다. ‘반파쇼 민주학생연맹’이라는 이름을 김병곤이 내놓았다. 정문화는 ‘반독재’라는 말로 바꾸자는 의견을 냈다. 박정희 정권의 성격을 ‘파쇼’나 ‘독재’로 못 박고 거기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자는 그런 주장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좀 소극적인 생각이 아닌가 싶었다. ‘반대한다’는 글자만 갖고는 우리가 목표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우리 스스로를 단순히 ‘반대 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으로는 모자랐다. 우리가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제시하고 그 주체로 나서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바가 무엇인지 밝혀야 했다. 그래야만 우리의 의지를 제대로 전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우리의 최종목표는 이 사회의 민주화였다. 그런 뜻에서 나는 ‘전국 민주청년학생 총연맹’이라는 명칭을 제의했다. 모두들 찬성했다. 이른바 ‘민청학련’은 그렇게 해서 결정되었다.

나중에 중앙정보부의 수사과정에서 그 명칭이 어떻게 결정된 것인가를 놓고 집요한 추궁이 있었다. 왜 그토록 끈질기게 그것을 밝히려고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우리를 반국가 단체로 몰아세우다 보니 혹시 또 다른 배후의 누군가가 정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심한 닦달을 했던 것 같다.
선언 주체가 결정되면서 우리는 유인물 만드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등사기를 사다가 유인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손작업이 무척 많이 갔다. 이근성이 후배들을 동원해 등사원지를 만들고 잉크를 묻혀가며 그 ‘중노동’을 도맡다시피 했다. 그 일을 위해 삼양동 자취방 옆에다 방을 하나 새로 얻을 정도였다. 그것도 모자라 여학생들을 동원해 광화문 근처의 한 레코드 가게 뒷방에서 또 다른 작업을 했다. 전국적으로 사용할 엄청난 양의 유인물을 만드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밤낮으로 그 일에 매달렸다.

거의 모든 준비가 끝나갈 무렵, 우리는 시위계획을 구체적으로 잡았다. 서울뿐 아니라 각 지역마다 조금씩 상황이 달랐다. 먼저 시작하는 곳과 뒤이어 나설 지역을 정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대구, 경북지역이 최초의 시위지역으로 선정되었다. 여정남 선배 등 그쪽 지역 책임자들이 자원하고 나섰다. 아마도 경북 지역이 조직적으로 가장 완벽한 곳이니까 맨 먼저 나서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드디어 봉화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1974년 3월26일, 봄볕이 대지전체에 엷은 안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문리대 교정에도 봄이 찾아왔다. 마로니에 나무들은 아직 잎을 피우지 않았지만 가지마다에서 봄이 느껴졌다. 나는 틈날 때마다 그 마로니에 가지들을 바라보며 봄기운을 느끼곤 했다. 그 무렵 나는 ‘보리수’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그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 아래 한 꿈을 꾸었네. 가지에 희망의 말 새기어 놓고서....’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3월 26일에 일어난 대구. 경북 지역의 데모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모든 준비 상태가 가장 완벽하다고 자신하던 대구, 경북지역의 선봉장격인 경북대학교에서 1차 데모를 시도했다. 결과는 허무할 정도였다. 처음에 우리가 기대하기로는 주동자 몇 명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구호를 외치면 많은 학생들이 ‘유신타도’의 깃발 아래 모여들어 순식간에 대규모 군중으로 바뀔 줄 알았다.

하지만 경찰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철저한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일을 벌이기도 전에 이미 많은 학생들이 예비 검속을 받고 잡혀갔다. 주동 학생들을 미리부터 격리시킨 것이다. 다른 학생들도 유신의 강압통치에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게다가 학교 안은 사복형사들과 교직원들의 감시가 번득였다. 그들은 학생들의 조그만 움직임에도 즉시 달려들어 제지시키는 한편, 주동자를 붙잡아갔다. 살벌한 풍경이었다. 학교 밖 진출은 둘째 치고 학교 안에서조차 시위가 불가능했다.
첫 번째 봉화는 그렇게 해서 마치 물먹은 장작더미에 지핀 불씨처럼 허무하게 꺼져버렸다. 우리의 실망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물론 모든 것을 낙관할 수 없다는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사기가 뚝 떨어졌다.
즉각 전국회의를 다시 열었다. 서울의 지도부와 각 지역 대표들이 모였다. 우리는 경북대에서의 실패를 놓고 얘기했다. 이 자리에서 새로운 방법을 찾자는 의견이 나왔다. 연세대, 서강대, 이대 쪽, 곧 신촌 대학가에서 한 번 더 시도해 보자는 것이었다. 다들 이 의견에 찬성했다.
4월1일을 기해 이들 대학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역시 모두 실패로 끝났다. 학교 안에서 불길을 일으켜 보려고 했다. 시도했다는 그 자체의 의미만 있을 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원인은 경북대의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정부의 대응은 신속하고 치밀했다.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이 이쯤 되자 또 다른 대책을 세워야했다. 실패의 연속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모두에게 위기감이 밀어닥쳤다. 결국 우리는 서울과 지방에서 순서를 정해 잇따라 대학별 시위를 벌이기로 했던 애초의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한꺼번에 모든 대학이 들고 일어서기로 결정했다.

날짜는 4월 3일로 정했다. 서울의 경우는 청계천 5가와 서대문 로터리에 집결하기로 했다. 서부지역의 대학들은 서대문 로터리에 모여 가능하면 시청 쪽으로 진출하기로 했다. 동부지역은 학생과 노동자가 합세해 청계천 5가를 중심으로 대규모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로 했다.
4월 3일 새벽.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거리 분위기를 살피러 돌아다녔다. 아니나 다를까. 시청 앞과 청계천 일대에는 벌써부터 경찰차 수백 대가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지나다니는 행인 숫자보다 경찰 병력이 훨씬 더 많았다.
서울 문리대, 법대, 의대 쪽에도 가보고 상대 쪽도 살폈다. 아무런 변화도 눈에 띄지 않았다. 청계천 일대와 시청 부근지역은 경찰 병력의 위세에 거리 전체가 잔뜩 주눅 들어 있었다. 다들 숨을 죽인 채 적막감만 가득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한 마음은 더해 갔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절망의 연속이었다. 그날의 시위는 서울 문리대에서 수십 명의 학생들이 산발적인 교내 시위와 함께 교문 밖 진출을 시도한 게 고작이었다 .그나마 현장에서 많은 학생들이 체포 연행되는 것으로 상황은 끝이 났다.

저녁 무렵, 이제는 모든 게 다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유인태는 그 무렵 서울에 올라와 있던 여정남과 함께 어느 식당에 마주앉았다. 광화문에 있는 허름한 음식점이었다. 하루 종일 굶은 터라 일단 허기를 면하고 대책을 세워보자는 자리였다.
나는 내키지 않는 밥숟가락을 몇 번 휘젖다가 소주를 들이켰다. 다른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긴말이 필요 없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결과는 훨씬 더 비참했다. 우리가 깃발을 들고 앞서 나가면 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이 나설 줄 알았다. 또한 대다수 국민들이 유신 타도의 대열에 동참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마음으로는 우리에게 공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 행동에 나서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경찰의 대비책 또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하고 엄청났다. 우리의 마음가짐과 그동안 해온 일들을 반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세 사람이 서로 반성하고 있을 때였다. 식당에 켜놓은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문득 고개를 돌려 화면을 쳐다보았다. 아나운서가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다는 정부 발표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아연 긴장했다. 소주잔을 내려놓고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유신체제를 비판하거나 이에 동조, 찬양, 편의를 제공하는 행위 등 어떠한 경우를 막론하고 최고형에 처한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

‘전국 민주청년학생 총연맹’(민청학련)과 이에 연관되는 제 단체를 조직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 회합, 연락 그 밖의 활동을 위해 장소, 물건, 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서 최고사형까지 처한다.

이것은 순전히 우리를 겨냥한 것이었다. 학생들의 총궐기를 시도한 ‘민청학련’을 상대로 박 정권은 ‘긴급조치’를 내놓은 것이다. 위반하는 경우에는 사형까지 처한다는 초강경 조치였다.
여정남은 얼른 우리를 일으켜 세웠다.
“이건 보통문제가 아니오. 심각한 위기 상황에 이러고 있을 수 없으니 일단 내 하숙방으로 갑시다.”
우리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신설동 산비탈에 있는 여정남의 하숙방까지 가는 것도 이리저리 빙빙 돌아서 갔다. 미행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며칠동안 그곳에서 보내기로 했다. 사실 우리 대부분은 전부터 수배를 받고 있었다. 활동한다는 것이 갈수록 힘들어졌다. 덕분에 변장과 가명 사용에 익숙해져 있었다.

삼양동 자취방도 4월 3일의 거사를 앞두고는 이미 하루전날 전원 철수를 한 상태였다. 결과가 불확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4월 3일을 기해 일단 흩어져서 개별적으로 행동을 하기로 했다. 대신에 일정한 연락체계는 유지하기로 했다. 우리는 매일밤 10시에 가능한 사람들은 다 모이기로 약속했다.
장소는 주로 버스정류장을 이용했다. 홍은동-연희동-동교동-서교동으로 이어지는 노선을 정해, 첫째 날은 서교동의 현재 청기와 주유소가 있는 정류장에서 만났다. 다음날은 홍은동 방향으로 한 정류장씩 거슬러 올라가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런 다음 시내버스를 함께 타고 가다가 적당한 장소에서 내리기로 했다.

그러나 약속은 하나하나 어긋나기 시작했다. 여정남의 하숙방에서 잠을 자고 적당한 변장에 안경까지 쓰고는 밖으로 나와 사태를 살폈다. 아주 빠른 속도로 대개의 동지들과 연락이 두절되었다.
황인성의 경우는 사건 직후에 외국인 선교사 집을 찾아가다가 권총을 들이대는 기관원들에게 체포되었다. 다른 지도자급 학생들도 어느 정도 피신했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속속 체포되었다.
나와 유인태는 고독하고 막막한 처지에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여정남의 하숙방에서 며칠을 견딜 수는 있었다. 그것도 일시적인 방편이었을 뿐 새로운 도피처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한 없이 막막했고 서로의 눈만 바라보았다.

당시 우리는 수사기관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몇 가지 도피용 비법을 정해 놓고 있었다. 전화를 사용할 때는 가정집 전화는 절대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에 반드시 공중전화나 가게의 전화를 쓰기로 했다. 그것은 초보적인 상식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나마도 한곳에서 1분 이상 통화하는 것을 삼가고 바로 현장을 떠나 사라지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불가피하게 긴 통화를 해야 할 경우도 절대 5분을 넘기지 않았다.
시간 약속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날짜에서는 하루를 빼고 시간은 오히려 두 시간을 더해서 말했다. 만일 누군가와 3월 15일 12시에 만나자고 했다면 실제 약속날짜는 3월 14일 2시가 된다. 왜냐면 날짜의 경우는 그날 이후부터는 이미 장소가 알려져 버리기 때문에 하루를 당겨서 말한 것이다. ‘-1, +2’라는 이 공식은 우리 ‘지도부’가 즐겨 사용한 기발한 착상이었다.

버스를 탈 때도 세심한 준비가 필요했다. 정류장에서는 우리가 어떤 노선의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모를 만큼 ‘먼 산 살피기’를 했다. 그러다가 타고 갈 버스가 도착해 승하차가 다 끝난 뒤 맨 마지막으로 출입문이 닫히려는 순간에 재빨리 차에 뛰어 올랐다. 만일 뒤이어 누군가 버스에 올라탔다면 그것은 영락없이 미행당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뒤따라 올라탄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도 쉽게 안심할 수 없었다. 바로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같은 방식으로 다시 다른 버스에 올라타야만 했다.
약속 장소를 다방으로 하는 경우에도 반드시 뒷문 출입구가 있는 장소를 골라 ‘들어갈 때는 앞문으로, 나올 때는 뒷문으로’ 하는 방식을 썼다. 특히 수배가 심해지면서부터는 그마저도 몇 차례의 확인을 거쳐야 했다.

나는 특히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야 할 경우는 숨바꼭질을 거듭하고서야 잠깐씩 만나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 친구를 광화문 덕수제과에서 만나자고 했다고 치자. 그럴 경우 나는 약속 시간보다 훨씬 먼저 그곳에 도착한다. 덕수제과 건너편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친구가 도착하는 것을 확인한다. 그런 다음 그 친구를 10분쯤 기다리게 했다가 전화를 걸어서 그곳에 있지 말고 광화문의 무슨 다방으로 오라고 장소를 바꾼다. 그 친구가 나오면 아무도 뒤따르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창밖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중간에서 불러 또 다른 제3의 장소로 데려간다. 물론 나중의 약속장소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
또 한 가지는 암호 사용이었다. 암호라기보다는 재미있는 줄임말이었다. 돈암동 태극당 제과점일 경우에는 ‘돈태’, 혜화동 태극당 같으면 ‘혜태’라는 식이었다. 이런 줄임말 같은 기발한 착상은 주로 임진택(현재 연출가)에게서 나왔다. 그 덕에 우리는 잡히지 않고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4월 3일 이후부터는 이런 어려운 약속마저 전혀 지켜지지 못했다. 약속 당사자들이 하나같이 체포됨으로써 약속 그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그렇게 은밀하게 만나고 가명을 쓰고 변장까지 해도 나의 행동은 금방 드러나고 말았다. 4월 3일 긴급조치가 선포되면서 나는 전국적으로 수배령이 내려졌다. 봄날의 그 마로니에 나무를 바라보며 불렀던 노래처럼 우리의 모든 기대는 ‘가지에 새겨 놓은 희망의 말’로만 남아버렸다. 그리고 그 가지들은 봄기운을 받아 속절없이 잎사귀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출처 : 김기선의 평전 이야기
글쓴이 : 삼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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